이번 달 초, 한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개발 중’인 지역으로부터 ‘개발된’ 지역으로 재분류되었다. ‘개발 중’인 지역과 ‘개발된’ 지역을 나누는 것에 대해 유엔무역개발회의는 “이 분류는 통계적 편의를 위한 것이지 개발 과정의 어느 단계에 도달했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분류가 이런 정도의 의미기 때문에 한국이 재분류되었다는 사실은 유엔무역개발회의나 해외 언론에서 공시하거나 알리고 있지 않다.
그런데, 아마 외무부의 자기 실적 홍보 활동의 결과겠지만 이 재분류 사실은 “한국 ‘선진국 지위’ 격상”과 같은 제목으로 많은 국내 언론에서 다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하게 선진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됐다”고 말했다.
여하튼 ‘선진국’이라는 말이 정부당국과 언론에서 나왔으니 ‘선진국’에 대해 따져 보자. 선진, ‘앞서 나아갔다’고 할 때 ‘나아갔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의 출발점이 자연이라면 자연에 내재한 아름다움과 고통에 대해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고통을 덜어나가는 것이 ‘나아가는 것’의 합당한 의미이다. 쾌고를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피부색을 이유로, 장애인라는 이유로, 어리다는 이유로,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그 자유를 존중받지 못하고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나아갈 곳이 남은 상태’이다.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했을 때 늘 따라오는 반론은 한국은 개식용 산업이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개는 오늘날 사람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한 존재이다. 그 사실이 언어로 표현된 것이 반려동물이라는 말이다. 애완동물이란 단어가 이제 거의 사라진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리고 사람 집에 사는 개와 농장에 사는 개는 다르지 않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에서 계양산 식용견을 겪어본 수의사의 말처럼 그들은 전혀 다르지 않다. 어느 나라든 많은 동물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자유를 존중받지 못하고 고통을 겪고 있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된 동물인 개에게조차 이러한 폭력을 산업적으로 가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점점 개식용이 줄고 있으니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 1년에 백만 마리의 개가 개소주와 개장국으로 죽어나가고 있다고 보자. 그리고 사람들이 개식용을 급격히 줄여나가 매년 그런 도살이 10%씩이나 감소한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죽는 개들의 수를 다 합치면 1,000만 마리가 된다. 인간인 너님과 마찬가지로 느끼는 존재이고 경험하는 존재이고 주관이 있는 존재이고 자기로 사는 존재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가 천만마리나 죽는 것이 별 문제가 아닌 것인가?
농장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공동체의 구성원을 분리해 내어 마음대로 잡아먹는 이 기괴한 현실을 즉각 없앨 도덕적 책무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권능을 가진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책무이다. 선진국 이야기는 개식용 산업을 철폐한 이후로 미루라.
-동물권단체 케어-